사적인 산문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무럭무럭 자란다면?

심호흡 2020. 2. 25. 23:35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했던가. 새해가 되자마자 나는 독감에 걸렸고, 병원에서 키를 쟀는데 성인이 되어 마지막으로 쟀을 때보다 2cm가 컸다. 독감에 2cm, 아픈 만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뻤다. 마침 퇴사를 했고 내 '쓸모'를 생각해보니 '굳이 회사들이 내가 필요할까?' 고개를 갸우뚱했고, 밥을 먹으며 '내가 숟가락 젓가락보다 쓸모가 있을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도했다. '성장'했구나.

 

어릴 적 학교에서 키를 잴 때면 '얼마나 컸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줄을 서곤 했다. 그땐 신경 쓰지 않아도 성장했고 어른들은 내 성장을 기뻐했다. 나이가 들수록 오랜 시간과 큰돈을 대가로 지불해도 성장한 느낌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곁에는 성장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마치 "놀 때도 배우며 놀고, 쉴 때도 생산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현상유지가 아닙니다. 남들은 계속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쪼그라든 사람을 누가 쳐다나 보겠습니까? 여러분~!" 하고 연설하는 것만 같다. 경제와 인구 성장이 뜨뜻미지근하다고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성장을 추구하는 '무서운 성장의 시대'를 나는 살고 있다. 그러니 공짜로 얻은 2cm는 얼마나 기쁜 일인가.

 

가끔 '모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무럭무럭 자란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힘든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성장하는 것이 한 가지쯤 있는 것이다. "어쭈 너 많이 컸다"란 말이 칭찬이 되고, 명절이면 노모와 성인이 된 아들이 "아이고 너는 어째 요새 점점 크는 것 같다", "네 어머니 올핸 3cm가 자랐어요", "그렇구나 나는 올해 1.7cm 자랐단다", "어휴 어머니도 그 나이에 대단하세요" 같은 훈훈한 대화를 나누는 사회 말이다. 그러면 키를 재는 날만큼은 다들 뿌듯해할 것이고 도대체가 인생에서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다며 우울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꿈에서 내게 성장을 재촉했던 연설가에게 따졌다. "그래 성장한다 칩시다. 그러면 저는 대체 뭐가 되는 건데요!" 연설가는 나를 세상이 다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데려갔다. 40일 금식한 예수님을 데리고 간 사탄처럼 그가 말했다. "그딴 걸 물을 시간에 성장해라. 저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안 보여? 일반적인 속도로 성장해서는 어림도 없어!" 나는 예수님처럼 당당히 그를 꾸짖지 못했다. 당장 책상에 앉아 자기 계발이든 개발이든 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성장이 기쁨이 아닌 생존이 되어버린 시대, 2cm만큼의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