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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2. 편지는 어떻게 깊어지는가책장 2020. 3. 19. 16:34
가족들과의 작별을 다룬 에세이집 <눈으로 하는 작별>을 읽고 대만 작가 룽잉타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책들 ‘인생 3부작’은 아들 안드레아가 태어날 시점에 쓴 <아이야, 천천히 오렴>, 아들이 18세일 때 쓴 <사랑하는 안드레아>, 부모와의 작별을 그린 <눈으로 하는 작별> 이렇게 3권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쓰인 순서와는 반대로 읽고 있다. 시간 순서대로 읽는 것이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기분이라면 역순으로 읽는 것은 룽잉타이와 가족들의 오래된 사진 첩을 보는 느낌이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 든다.
대만에 있는 룽잉타이는 독일에서 유학 중인 아들에게 편지 형식의 칼럼을 함께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아들 안드레아는 수락하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은 험난하다. 안드레아는 중국어를 글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영어로 편지를 나눈 후 중국어로 번역해서 칼럼에 기고한다. 그러나 이 복잡한 과정이 편지의 깊이를 더한다. “이 단어는 무슨 뜻이니? 왜 그 단어가 아니라 이 단어니? 이 단어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뭐니?”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묻고 토론하며 그들의 표면적인 언어는 벗겨지고 가슴 깊이 있었던 본심에 가까운 말이 남는다.
공개된 편지였기에 세계 각국 독자들로부터 답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안드레아>에는 룽잉타이와 안드레아가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 그 편지에 대한 답장, 답장에 대한 생각을 서로 나눈 편지가 수록됬다. 독자들은 그전까지 대화하지 못했던 자녀나 부모와 대화를 시작한다. 룽잉타이 모자는 룽잉타이와 비슷한 세대, 안드레아와 비슷한 세대로부터 그들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듣는다. 둘의 편지는 이제 둘만의 편지가 아니게 된다. 국가와 국가, 세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편지의 장이 된다.
안드레아 -> 룽잉타이 룽잉타이 -> 안드레아
엄마는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늘 플래시 세례를 받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엄마를 어떻게 기억해주길 바라세요?
인생에서 가장 번뇌스럽고 가장 후회스러운 한 가지는요?
최근 나를 호되게 패줬으면 싶었던 적이 있다면 언제, 무슨 일이었어요?
엄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하나요?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나요? 유명하지 않은 사람과 유명한 사람을 한 사람씩 말해주세요.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공간으로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엄마가 두려워하는 건 뭐죠?
네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지? 왜 그 사람을 존경하니?
넌 ‘자유파’니 ‘보수파’니?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는 시민이니?
배신이라 할 만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니? 있다면 언제?
앞으로 뭘 하고 싶니?
너는 무엇을 가장 동정하니?
너, 최근에 진짜 고통스럽게 울어본 적은 언제니?
책의 뒷부분에는 서로에 대한 질문 세례가 이어진다. 둘의 질문을 자세히 보면 상대에게 궁금한 점도 있지만 결국 질문자가 현재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룽잉타이는 사회적인 문제와 고통받는 이들에 관심이 많고, 존경했던 이에게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고 안드레아는 어른이 되어가며 미래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상대의 대답을 이끌어 내면서 자신의 상태도 전달하는 것, 질문이 대화를 여는 좋은 통로가 되는 이유다.
‘그래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요, 엄마 감사해요. 저에게 이 ‘소임’을 주셔서 고마워요. 책을 낸 것 말고요.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갈 ‘소임’ 요.’
– p.15 엄마 감사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의 그물 속에 던져진다. 대부분이 선택해서 맺은 관계가 아닌 사회적으로 주어진 관계다.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두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나와 타인이 연결된 느낌은 보다 은밀하고 사적이다. 관계를 깊게 만들어가는 적극인 노력, 가령 갈등과 오해를 겪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시간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연결을 알아가는 게 안드레아의 소임이었듯이 타인과 나를 사적으로 연결해 의미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 아닐까? 가까운 자와도, 먼 자와도, 아픈 자 와도, 싫은 자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아가는 것이 지구에 이토록 많은 사람을 만든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작은 임무’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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