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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천천히 오렴> 아이는 무엇을 비추는가책장 2020. 3. 22. 11:47
노파에게 장미 값을 계산 하자 가게 안에 있던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장미를 묶기 시작한다. 발그스레한 뺨의 꼬마는 작은 손가락으로 나비매듭을 만들려 애쓰지만 막 당기려는 순간 스르르 풀어져 버리는 탓에 할머니에게 거친 욕을 듣는다. 석양이 지는 돌계단에 앉아 룽잉타이는 아이를 바라본다. 천천히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보충학습비를 가져오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 60명이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그 아이를 불러냈다. 털양말을 2겹으로 신고 있던 룽잉타이와는 달리 그 소녀는 맨발이었으며 헝클어진 머리에 더럽고 해진 교복을 입고 있었다.아이는 선생님께 한참을 맞았고 급기야 머리 부스럼이 터져 흐른 피가 교복을 적셨다. 충격을 받은 룽잉타이는 다음날 학교에 결석한다. 하루가 더 지나고 학교에 가보니 자신은 돌아왔지만 선생님께 맞았던 친구는 없었다. 동생 셋을 데리고 강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살 때의 일이었다.어른이 된 룽잉타이는 장미를 묶느라 낑낑대는 한 아이 앞에 서있다.
‘비에 젖은 거리, 좁은 골목 안 허름한 꽃가게 안으로 비스듬히 햇살이 비춰 든다.
같은 시각, 병원에서는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으며 의사가 피에 젖은 탯줄을 자르고, 폭죽 연기 속에서 젊은 남녀 한 쌍이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한다. 그리고 뒷산 샹쓰 숲에서는 무덤 위 잡초가 비에 젖은 흙 위로 조금씩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석양이 옅게 드리우는 돌계단에 앉아, 눈이 맑은 꼬마 아이가 열심히 뭔가에 몰두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나는 평생을 기다릴 것이다. 이 아이가 천천히 나비매듭을 완성할 때까지. 다섯 살의 작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오렴. 아이야, 천천히 오렴. ‘
- P. 13 서문
책 <아이야, 천천히 오렴>은 어쩌면 룽잉타이의 아들 안안 태어나기도 전, 새끼줄로 장미를 묶는 일을 해야만 했던 아이와, 그런 아이를 보며 떠올린 그녀의 어릴 적 기억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장미를 사다가 수십 년 전 자신과 마주한 작가는 처음 엄마가 되어 아이와 수많은 ‘처음’을 함께하며 얼마나 많은 기억과 만났을까?
<아이야, 천천히 오렴>에는 처음 엄마가 된 작가 룽잉타이가 첫째 아들 안안, 둘째 페이페이를 기르며 겪는 나날이 기록되어있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며 겪는 에피소드가 많다. 작가인 엄마가 언어에 관심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대만인 엄마와 독일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안안이 스위스에 살며 중국어, 영어, 독일어, 스위스 독일어를 섞어 쓰는 바람에 벌어진 일들이다.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분노하고, 동생을 더 사랑하지 않느냐고 펑펑 울고, <수호전>을 읽고 동네 어르신들을 약탈(?)하는 아이들의 귀엽고 순수한 모습은 읽고만 있어도 미소 지어진다. 처음 엄마가 되어 허둥대지만 사랑을 듬뿍 담아 아이들을 보는 룽잉타이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행복했던 순간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유독 겁이 많은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좋아하던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은 내게 장난감이 아니라 눈물을 터뜨리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선 항상 엄마 뒤에 숨었고 비 오는 날 천둥이 쳐도, 동화책에 귀신이 나와도 울며 불며 숨을 곳을 찾았다. 어린이가 되어서도 놀이기구도 무서워서 타지 못해, 소풍을 가면 친구들 가방을 지키거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넓은 놀이동산을 뱅뱅 돌곤 했다. 희미하게 기억하던 20여 년 전 어릴 적 나날들이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재생됐다.
지금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괜찮다고, 너가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며 꼬옥 안아주다가 “지금 아저씨도 무서운 게 많아. 그런데 가끔 숨고 도망치는 것도 비겁한 게 아니란다.” 하며 작은 등을 한참 쓰다듬어 주고 싶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질문을 모은 그의 책 <질문의 책>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어른들 이 질문을 아이들로부터 받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거울이라는 아이들은 다 큰 어른뿐 아니라 그 어른의 어린 시절까지 비추기 때문이다.
나였던 내 아이들은 지금도 내 안에 살고 있다. 무서운 게 많던 아이, 상상하기를 좋아하던 아이, 잘난 체하는 사람을 싫어했던 아이들 모두 말이다. 어떤 아이는 오래도록 잠을 자고 어떤 아이는 자주 깨어있을 뿐이다. 지금 보이지 않는 아이라고 해서 내 모습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언젠가 어떤 사건이, 한 사람이 그 아이를 불러올 때 낯설어 당황하지 않으려면 그 아이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안아줘야 한다.
어른이 되는 것은 멋지게 변신하는 것도, 과거의 나를 지워가는 과정도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를 알아가고 그들을 사랑하며 품는 것이다. ‘현재의 나’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나’가 되어 내 안에 어린아이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때 더 나이가 든 나는 내 안에 있는 ‘20대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천천히 생각에 잠긴다.
분명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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