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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책장 2020. 3. 27. 18:09
너의 슬픔이 아름다워 나는 편지를 썼다 /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 나지윤 옮김 / 예문아카이브
누구나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말은 공허하고 ‘힘내’라는 말은 잔인하며 ‘괜찮아?’ 묻는 것은 강요 같았다. 하지만 지금 슬퍼하고 있는 그가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함께 울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고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문학평론가이자 일본의 유명한 문장가인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암으로 부인을 잃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며 지쳐가는 아내를 보면서도 아내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한다. ‘슬픔’이라는 익숙한 두 글자가 그의 삶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아내는 2010년 2월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후 나는 오랫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슬픔 곁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느꼈던 슬픔과 지금의 슬픔은 결이 다릅니다.
p. 104 그대여, 그대가 오직 진리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잃었을 당시 느꼈던 슬픔과 지금의 슬픔은 결이 다르다고 말한다. 심지어 슬픔은 아름다우며, 슬픔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책에 그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는 NHK 사회부 기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마이니치 신문에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담은 책에서 그가 체험한 슬픔의 깊이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슬픔이란 곁을 떠난 사람이 다가오는 신호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옆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가까이 있다고 느낍니다. 힘들 때 곁에서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소중한 사람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죠. 먼 길을 떠나버린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존재가 사라졌다’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p. 57 어둠 속에서 홀로 베개를 적시는 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이 한 문장은 이별한 두 사람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아내와의 사별 후 종종 자신을 응원하는 듯한 아내의 존재를 느꼈을 때 정신적인 문제나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떠난 아내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 공기처럼, 사랑처럼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분명히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슬픔과 이별을 재정의한다. 슬픔을 아름답게 정의해서 슬픔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슬픔을 아름답게 느껴서 슬픔을 아름답다고 정의할 수 있었을까. 순서야 어떻든 지금 그는 슬퍼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다카코는 오직 자신을 위해 시를 썼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적어 내려간 말이 저절로 시가 됐고 자신의 시로 구원받았습니다. 자신의 말로 스스로를 구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자신을 진실로 구원하는 말, 자신의 영혼을 요동치게 만드는 말은 늘 자기 내면에서 나옵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의 격언도 당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리는 말을 위한 길잡이에 불과합니다.
- p. 66 어둠 속에서 홀로 베개를 적시는 밤
자기가 내뱉은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이, 글로 쓴 말을 가장 먼저 읽는 이는 자신이다. 저자는 유방암이 걸린 다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 다카코를 소개한다. 다카코는 슬픔으로 가득 찬 밤 자신 안에 흐르는 아름다운 언어를 붙잡아 시로 적었고, 그 시는 슬픔을 가진 이들을 위로했다. 그녀의 시를 제일 먼저 읽은 사람, 가장 많이 위로를 받은 사람 역시 다카코 자신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말과 글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마음을 만지는 듯한 위로는 나의 슬픔의 깊이를 가장 잘 아는 한 사람, ‘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이스케는 자신과의 만남이 필요한 이들에게 편지로 슬픔과 위로의 비밀을 조심스레 전한다.
깊은 슬픔에 잠기면 오히려 눈물샘이 말라버리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태연한 얼굴로 길을 걸어가는 무수한 군중 속에도 분명 슬픔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가슴속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눈물은 반드시 두 뺨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
하라의 글은 슬픔이 바로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우리를 이어주고 위로를 건넵니다. 슬픔에는 슬픔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슬픔이 누군가의 슬픔을 구하고, 누군가의 슬픔이 내 슬픔을 구합니다.
- p. 120 보이지 않는 눈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나도 그럴 것이다. 그때 충분히 슬픔 속에 허우적대고 눈물을 흘리고 나면 이 책의 문장들이 하나씩 떠오를 것 같다. 그 문장들을 가만히 곱씹고 나면, 더 많은 슬픔을 감지할 것이다. 내 앞에 밝게 웃고 있는 친구의 숨은 슬픔을 보고, 슬퍼 우는 이들의 눈물이 절망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혹 누군가에게 편지하게 될지 모르겠다. 아프게 건져 올린 위로의 말을 작은 종이에 적으며, 슬픔으로 슬픔을 구원할 수 있길 기도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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