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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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천천히 오렴> 아이는 무엇을 비추는가책장 2020. 3. 22. 11:47
노파에게 장미 값을 계산 하자 가게 안에 있던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장미를 묶기 시작한다. 발그스레한 뺨의 꼬마는 작은 손가락으로 나비매듭을 만들려 애쓰지만 막 당기려는 순간 스르르 풀어져 버리는 탓에 할머니에게 거친 욕을 듣는다. 석양이 지는 돌계단에 앉아 룽잉타이는 아이를 바라본다. 천천히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보충학습비를 가져오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 60명이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그 아이를 불러냈다. 털양말을 2겹으로 신고 있던 룽잉타이와는 달리 그 소녀는 맨발이었으며 헝클어진 머리에 더럽고 해진 교복을 입고 있었다.아이는 선생님께 한참을 맞았고 급기야 머리 부스럼이 터져 흐른 피가 교복을 적셨다. 충격을 받은 룽잉타이는 다음날 학교에 결석한다. 하루가 더 지나고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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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2. 편지는 어떻게 깊어지는가책장 2020. 3. 19. 16:34
가족들과의 작별을 다룬 에세이집 을 읽고 대만 작가 룽잉타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책들 ‘인생 3부작’은 아들 안드레아가 태어날 시점에 쓴 , 아들이 18세일 때 쓴 , 부모와의 작별을 그린 이렇게 3권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쓰인 순서와는 반대로 읽고 있다. 시간 순서대로 읽는 것이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기분이라면 역순으로 읽는 것은 룽잉타이와 가족들의 오래된 사진 첩을 보는 느낌이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 든다. 대만에 있는 룽잉타이는 독일에서 유학 중인 아들에게 편지 형식의 칼럼을 함께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아들 안드레아는 수락하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은 험난하다. 안드레아는 중국어를 글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영어로 편지를 나눈 후 중국어로 번역해서 칼럼에 기고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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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1.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시들해졌다면책장 2020. 3. 18. 18:04
어떤 편지는 오해에서 시작된다. 대만 작가 룽잉타이와 그의 열여덟 살 아들 안드레아가 3년 동안 주고 받은 편지도 처음엔 오해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도, 그냥 아는 것과도 다르다. 사랑은 때로 좋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할 때 핑곗거리가 되곤 한다. 사랑이 있으면 제대로 된 소통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이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 한다. 남자아이 안안(안드레아의 아명)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장한 안드레아를 알아갈 수는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 p8. 열여덟 살 사람을 알다 사랑은 종종 사랑의 대상마저 가려버린다. ‘사랑하니까’라는 이유로 상대를 쉽게 정의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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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3. 글의 '좋은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책장 2020. 3. 9. 17:46
문제는 재미없는 책이 아니라 재미있는 줄 알고 샀는데 읽어보니 재미없는 책이다. 이런 책은 차마 덮어버리면 자존심이 상해서 꾸역꾸역 읽게 되는데 결국 얼마 가지 못해 덮게 된다. 다른 물건과 달리 아무에게도 줄 수 없이 책장에 일정한 폭과 높이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책. 대만 작가 룽잉타이의 은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덮었다. 너무 좋아서. 떨려서. ‘와 이거다 싶어서’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자 책을 덮었다 다시 핀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바로 한번 더 읽고 나니 궁금해졌다. 왜 룽잉타이의 에세이는 ‘좋은’ 느낌'을 주는 걸까.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좋았던 부분을 모아보았다. 지루하지 않은 집요함 에는 룽잉타이가 사전이나 고서에서 검색한 정보로 쓴 에세이가 많다. 불과 2페이지 반 분량의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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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2. 언젠가 이별의 시간을 만난다면책장 2020. 3. 7. 21:38
나는 언제든 이별을 만난다. 나는 언젠가 이별을 만날 것이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에 마음이 아린 날이면 나는 이 책을 펼쳐볼 것이다. 이 책은 이별에 관한 책이다. 은 ‘목송’, ‘풍경’, ‘시간’ 이렇게 3장으로 구성되었다. ‘목송’은 낯선 단어였다. 사전을 찾아보니 ‘떠나는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보낸다’는 뜻이다. 이 책의 제목이자 첫 번째 에세이 ‘눈으로 하는 작별’이 곧 목송의 뜻이었다. 에세이 ’눈으로 하는 작별’은 룽잉타이가 아들 안드레아의 첫 등교를 함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건물로 사라지던 아이의 뒷모습과 안드레아가 16살 때 교환학생으로 출국심사장을 들어가는 뒷모습, 21살이 된 아들이 그녀가 강의하는 대학에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어서 초라한 트럭으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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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1. 동해에서 뵙네요. 룽잉타이님!책장 2020. 3. 5. 23:00
대만을 생각하면 초록색이 떠오른다. 책방 식구들과 함께한 첫 대만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샤오롱 빠오,망고빙수, 101층이나 되는 타워, 야시장도 아닌 집집마다 발코니에 가득 키우는 화초와 나무, 건물 벽을 덮은 덩굴이다.그리고 그 초록색을 가장 진하게 뿜어내던 대만의 작은 서점 ‘청경우독’을 나는 기억한다. 책방에 도착했을 땐 북토크를 하고 있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기도 똑같구나’ 묘한 동질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열어둔 문과 창으로 새어나오는 중국어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산책했다. ‘맑은 날에는 농사일을 하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 다’ 뜻의 책방 청경우독은 오래된 나무들에 둘러싸였고, 서점 앞 넓은 잔디 마당은 푸르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