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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1. 동해에서 뵙네요. 룽잉타이님!책장 2020. 3. 5. 23:00
대만을 생각하면 초록색이 떠오른다. 책방 식구들과 함께한 첫 대만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샤오롱 빠오,망고빙수, 101층이나 되는 타워, 야시장도 아닌 집집마다 발코니에 가득 키우는 화초와 나무, 건물 벽을 덮은 덩굴이다.그리고 그 초록색을 가장 진하게 뿜어내던 대만의 작은 서점 ‘청경우독’을 나는 기억한다.
책방에 도착했을 땐 북토크를 하고 있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기도 똑같구나’ 묘한 동질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열어둔 문과 창으로 새어나오는 중국어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산책했다.
‘맑은 날에는 농사일을 하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 다’ 뜻의 책방 청경우독은 오래된 나무들에 둘러싸였고, 서점 앞 넓은 잔디 마당은 푸르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고 있었다. 책방 건물 역시 나무여서 책방을 포함한 그 일대가 작은 숲 같았다. 주변만 걸어도 맑아지는 느낌에, 몇번이고 코로 힘껏 공기를 빨아들였다. 가히 비가 온다면 총총걸음으로 들어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실컷 책을 읽고 싶어 지는 운치였다.
북토크가 끝나고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중국어로 젊은 책방 주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부부는 책방을 내는게 꿈이었고 오랜 준비 끝에 이곳에 책방을 냈다고 한다. 책방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과정을 작은 그림책으로 매년 출판하며 올해는 3년째 되는 해였다. ‘당신에게 책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만 사람들은 요즘 어떤 책을 많이 읽습니까’ 같은 질문은 하지 못하고 눈을 가득 채운 초록과 아쉬운 마음만 담은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by '단순한 진심' 네이버 블로그, http://sincerity.kr/221784863518 3년이 지났다. 나는 강원도 동해 한 책방에 있다. 자매가 운영하는 ‘서호책방’의 이름은 언니의 두 아이 이름 ‘예서’, ‘예호’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글 서(書), 좋을 호(好), 글과 책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책을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는 책방지기의 바람도 담겨있다. 겨울 오후, 사람은 없었고 나무 책장과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온기가 느껴졌다. 벽에 걸린 작은 괘종시계가 똑딱 똑딱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을 고르는데도 많은 정보보다는 ‘느낌’이 더 크게 작용한다. ‘눈으로 하는 작별’이란 제목과 차분한 색의 표지, 멋스러운 푸른색 한자가 눈을 끌어 책을 집어든다. ‘룽잉타이’ 이국적인 작가의 이름을 가만히 두 번 발음해본다. 첫번째는 한국어처럼, 두번째는 중국어처럼 제법 성조를 넣어 읽어본다. 책 날개를 펴보니 타이완의 대표적인 지성, 중화권 최고의 사회문화비평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설명한다. ‘대단한 사람이구만’ 관심이 간다. 대표적인 저서가 비평적인 에세이가 아닌 ‘룽잉타이 인생 3부작’이라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한다.사랑하는 안드레아>, <아이야, 천천히 오렴>, <눈으로 하는 작별> 날카로운 지성만큼이나 감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뒤표지를 본다. 신경숙 소설가의 추천사 아래로 책의 내용을 인용한 한 문장으로 시선이 쏠린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가만히 속삭인다. “그쪽은 내 딸을 닮았네요”'
그려진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시키는 딸. 중화권에서 ‘지식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에 선정되고, 2014년 초대 타이완 문화부 장관을 지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만 최고의 지성 룽잉타이 이기 전에 딸로서 마주한 엄마. 아빠, 부모로서 마주한 아들, 그들과의 이별을 담담히 글로 써내는 한 사람. 아 나는 이 책을 사야 한다.확신이 차오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 보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게 될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책을 사서 나왔다. 겨울 바다 바람에 코끝이 찡해졌다. 대만에서 느꼈던 초록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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